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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 시대인 고조선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제천의식을 담당하는 무당과도 같은 존재였다. 삼국시대에 들어 관습률로 지배하던 초기 국가의 형태는 점점 사라지고 중앙집권 국가체계의 형식을 갖춰 나감으로써 종교적인 의식을 담당하는 왕의 역할은 축소되고 정치적으로 왕권 강화를 통해 왕이라는 존재가 확고히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던 시기에 연맹 국가 형태인 가야도 성장하고 있었지만,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562년에 결국 신라에 흡수되었다. 삼국은 문화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 도교, 유교 문화를 흡수하는데 특히 불교는 통치를 위한 정신적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토속 신앙도 여전히 존재했다.

 

통일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라어가 중앙 언어로 통용되었고, 지속해서 다른 국가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라는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신라 특유의 신분제인 골품제도를 형성하고 유지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왕위의 직계계승원칙을 확립하였다.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결혼 풍속 관련 자료를 토대로 추측해볼 때 삼국시대 역사 이전부터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대등하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의 결혼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도의 기본 성격은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사유재산 및 신분제의 변화와 함께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일부다처제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 왕실에서는 왕위의 직계계승원칙과 골품제도에 따라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족 간의 근친혼이 있었는데, 왕위계승에서 박씨, 석씨, 김씨의 세 성씨가 번갈아 왕이 된 사실로 볼 때 세 성씨가 서로 통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혼이 지배권의 혈통을 잇고 특권을 유지하며 지배권을 합법화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는 모계 중심의 풍습으로 서옥이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고구려 풍속에는 서옥제, ,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사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모계 중심의 처가살이와 노동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풍속이다.

서옥제의 진행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혼은 양가의 허락 하에 약혼이 성립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약혼 후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오기 전 본채 뒤에 사위집을 지어 두고 신랑을 기다린다. 예정된 결혼 날이 되면 신랑은 저녁에 신부집 문 앞에 이르러 신랑 본인의 이름을 대고 절을 하고, 신부와 함께 들어가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한다. 신부 부모는 신랑의 요청에 따라 허락을 하고 마침내 신랑은 신부집에서 미리 마련해둔 사위집인 서옥에서 신부와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후 결혼한 부부는 서옥에서 함께 지내다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장성한 후에야 남편의 집으로 돌아갔다.

 

 

서옥제의 진행 방법

언약(言約)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짓고 서옥(婿屋)이라 칭함
서옥이 완성을 신랑 측에 고함
신랑은 오후 68시 사이에 신부 집으로 감
도착하여 성명을 아뢰고 절하며 신부와 동숙(同宿) 하기를 23번 정도 청함
신부 부모는 신랑에게 서옥에서 여자와 宿 하기를 허락함
신랑은 준비한 전백(錢帛)을 여자 측에 전달함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귀가(歸家)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풍습과 법을 고려해 보면 거의 동일하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삼국시대 세 나라의 결혼 풍습은 거의 동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주변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이 중앙집권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갈 무렵 낙동강 중·하류 지역에서 연맹 국가로 존재했던 가야에서는 최초의 국제결혼인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음을 예측할 만한 신화가 있다.

삼국유사김수로왕신화에서는 금관가야의 시조신인 김수로왕과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혼사를 전하고 있는데, 수로왕비는 현재 인도의 ʻ아요디아ʼ라는 곳인 당시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라고 알려져 있다. 수로왕비는 가야국으로 들어올 때 신하와 비복을 거느리고, 비단옷감, 의복, 패물류 등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고 김수로왕과 수로왕비는 슬하에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고 순조로운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비는 단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렇다면 김수로왕의 결혼은 오늘날 다문화가정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참고 서적 및 자료]
https://weddingculture.tistory.com/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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