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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_정치·경제]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 등을 거치면서 조선의 중심 사상인 유교적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로 조선은 자생적 의지를 갖추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전에 결국 일제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배의 역사는 한국 근대화의 과정을 왜곡시킨 것도 사실이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로서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서열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사회의 정신적 이념으로써의 유교의 역할은 부정되었지만, 기존 유교적 규범의 몇 가지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일제는 강압적인 관료체제를 갖추고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유도하기 위하여 충()과 효()라는 유교 도덕관념을 강조했다. 이는 천황의 권위를 가족 단위의 가족을 대표하는 자인 ʻ가장(家長)ʼ과 동일시하면서 가장에 대한 순종을 천황에 대한 복종으로 교묘히 연결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한국에서 시행된 식민지 교육방법은 대체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ʻ메이지유신ʼ 시대 이후 교육내용을 정치적으로 식민지에 적용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교과서에는 근대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충효 사상 등 유교 사상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시체제가 본격화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문화향유는 억압되었다. 1931년부터 1941년까지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고 한국에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어가 퍼지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없애고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사상 교육이 강화되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한국의 친일 지식인인 문인, 언론인 등까지 앞장서서 젊은이들에게 천황을 받들고 목숨을 바쳐 태평양 전쟁 승리에 이바지하자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사회 질서를 살펴보면, 식민지적 상황에서 봉건제적 질서가 기본 사회구조로 유지되었다.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소수의 상공업 종사자가 있었으며 일본과는 경공업과 농업의 수직적인 분업체계로 농민수탈이 극에 달해있었던 시기이다. 다수의 민중이 수탈되고 기아선상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지식인층과 부유층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봉건적 생활양식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법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1909년 일제는 민적법 을 시행한다. 이를 통해 성()이 없던 천민들은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성이 없는 천민계층에게 신청하는 대로 김(), (), () 등 유명성씨의 호적을 줌으로써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반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의 시행과 함께 국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ʻ돌쇠ʼ, ʻ마당쇠ʼ, ʻ향단이ʼ, ʻ오월이ʼ들은 새롭게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양반의 성씨를 얻어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1912ʻ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ʼ을 제정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적용되었던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기본법이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ʻ조선민사령ʼ을 제정(조선통감부제령 제71912.3.18)하고 191241일부터 이를 통해 일본 민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였다.

또한, 1934년 조선총독부는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를 간소화하는 규칙인 ʻ의례준칙ʼ을 반포한다. 이는 의례를 통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민족 공동체 의식을 억제하고, 전시 지원을 위한 물자 절약과 인력 동원을 위한 정책의 한 단면이었다.

 

 

[시대적 배경_사회·문화]

 

갑오경장 이후 한국의 역사는 서양을 모방하고서 서양처럼 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해서 일본문화와 일본의 색채가 담긴 서구 문화가 들어왔고, 서양에서 들어 온 천주교, 기독교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근대적인 기술과 교육제도, 자본주의 시장 제도와 산업 시스템은 일제식민지 기간을 통해 도입되었다. 영화와 방송 시스템, 대중음악과 대중매체 등의 근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식민지 시대에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서 서양식 문화가 한국 사회로 빠르게 유입되었고 이는 한국의 문화적 감수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근대적인 대중매체가 확산으로 인해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서구적인 문화와 감성이 빠르게 퍼져나가게 된다. 1930년대에는 서구식 패션이 유행하였으며, 축음기가 보급되었고 영화관의 관객이 늘어났다. 다방과 카페 같은 장소가 출현하고 댄스홀 등 새로운 서구식 유흥과 오락이 등장하였다. 아래와 같이 서구식생활 양식 추구하고 서구식 복장을 따라 하는 ʻ모던보이ʼʻ모던걸ʼ이 나타나기도 했다.

 

모던보이, 모던걸을 묘사한 삽화

출처 : 잡지 별건곤ʼ 19272월호

 

 

[결혼문화의 변화]

 

결혼문화는 한 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일제식민지 시대의 영향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사회제도와 종교, 사상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움 속에서 변화를 지속했다.

무엇보다도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ʻ의례준칙ʼ에서 혼례장소는 신부집 이외에 신사와 사원 혹은 교회당을 제시하였고, 결혼 의상도 한복 이외에 양장 등을 제시한 세부사항들은 한국 결혼문화 변천에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서구문물의 영향으로 결혼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여 신여성들을 중심으로 남녀 사이의 자유롭고 건전한 교제가 행복한 결혼뿐만 아니라 행복한 가족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여성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는데, 일본강점기에 여성 교육도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책임과 헌신을 다하는 ʻ현모양처ʼ를 양성한다는 목적의식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대의 결혼관 및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여성상에 영향을 미친다.

한편, 기독교의 전파와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나타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결혼식이 등장하는데, 1890,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설립된 ʻ정동교회ʼ 예배당에서 진행된 신도 강신성과 박신실의 예식이다. 이 결혼식을 시작으로 2년 뒤인 1892년에는 배재학당 남학생과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황씨의 결혼식에서 신랑은 프록코트를 입고 예모를 썼고,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착용했다. 또한, 1900년대에는 불교계에서도 ʻ불교식 화혼법ʼ이 등장한다.

1920년 일제는 식민지 조사를 전개하는 한편 내선일체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하나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통해 조선을 일본 제국의 영토로 만들려는 야욕을 정책화했으며 그중 한 가지 수단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과 일본 메이지 천황의 조카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의 장녀인, 후에 이방자 여사로 불리는 마사코, 두 왕족의 정략결혼을 추진하였다. 아래와 같이 행해진 영친왕의 서구식 결혼 양식은 한국 결혼 역사에서 결혼식과 의상 변화, 결혼 과정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영친왕 부부의 결혼사진

출처 : 문화재청

 

이 예식은 일본식의 예를 갖춰 동경에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창덕궁 인정전에서 서명부를 갖춰 방문객의 축하를 받았고 동행각에서 피로연을 했다. 또한, 신부의 결혼 의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르누보 영향을 받은 자카트 공단에 동양적인 색조와 실루엣의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라운드 네크라인을 깊게 파고 소매는 팔꿈치 길이에 긴 장갑을 끼었으며 웨이스트라인에 리본 장식이 있고 언밸런스하게 연출하여 덧단 테일은 길고 폭이 넓었다. 머리에는 타조 깃을 장식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관을 썼으며 긴 베일을 머리 뒤에서 늘어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년대 후반부터 혼례의 간소화를 주장하는 개화 사회운동을 벌이던 계명구락부를 중심으로 예식장에서 행하는 신식결혼인 ʻ사회결혼ʼ이 보급되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결혼을 위해서 교회와 절이 활용되기도 하였고, 결혼을 위한 단독 공간인 전문적인 예식장이 생겨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전문예식장의 등장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점차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서구식 결혼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게 된 이유는 전통적인 결혼식에서는 족두리에 원삼을 입은 신부와 사대관모를 갖춰 입은 신랑이 서로 마주 보고 절을 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데, 이런 전통혼례의 절차를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전통혼례에 대한 선호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편하고 실리적인 서양식 결혼을 선호하는 현상이 점차 늘어났던 것이다.

전문예식장에서는 전문예식장을 선호하는 고객의 욕구에 맞게 상업화 전략과 편의성을 목적으로 예식 공간뿐만 아니라 연회 공간 및 공용공간과 부대시설까지 완비하였다. 종교결혼식에서도 예식자가 비신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식을 갖춘 예식보다는 신식결혼의 형식으로만 결혼식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동교회와 같은 교회나 절, 현재 세종문화회관 별관 자리인 부민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사의 강당이나 명월관 같은 요리집에서도 결혼식이 거행되었는데, 최초의 현대 예식장은 ʻ만화당 예식부ʼ이다.

이후 1930년대에는 결혼식에 화동이 출현하고, 서양식의 웨딩드레스와 베일이 유행하게 된다. 이 시대의 신식결혼을 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근대 사상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 부유층, 기독교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었다.

근대 지식을 습득한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는 예배당과 예식장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결혼문화였다.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연애 사상이 팽배해지고 사랑을 전제로 결혼을 결정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퍼지게 되면서 특히 도시의 신여성 사이에서는 자유연애와 근대 결혼에 대한 선호가 우세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과는 다르게 둘의 결혼은 사랑의 결실로 맺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곳을 결혼 공간으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모닝코트와 하얀색 면사포를 대여하여 식을 진행하는 모습은 단순히 전통혼례의 허례허식과 비용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써 실리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청년세대의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결혼과 결혼식의 이미지였음을 시사한다.

계명구락의 움직임은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전통혼례의 허례허식을 줄이고 종교적인 특색을 제외한 결혼 방식으로 보급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전통문화에서의 불필요한 부분을 보완하고 새로운 문화와의 결합을 통한 결혼식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하지만 1920년대에는 자유결혼에 대한 의견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보였다면, 신여성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분위기가 조성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여성들조차 오히려 전통적 중매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의 결혼문화 중 특이한 점은 19201930년대에 종교시설이나 공회당 또는 요릿집 등에서 신식예식이 예식의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신식으로 결혼식을 진행하더라도 다시 부모님 집에서 전통적인 예를 갖춰 전통혼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는 옛것과 오늘의 것, 중세와 근대의 접점에서 결국 가족 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적응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것을 절충하는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결혼식의 여러 절차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폐백'이다. 오늘날의 결혼식의 식순은 보편적으로 의례의 간소화 이후 시작된 서구식 혼례를 따르고 있으며, 전통혼례의 한 절차인 폐백이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새롭게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는 결혼문화는 피로연과 답례품 문화가 있다. 일본에서의 피로연은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에게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으로 우리의 잔치에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은 당대 결혼문화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보는데 동경에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창덕궁에서 방문객을 받고, 동행각에서 피로연을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결혼 피로연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답례품 역시 일본 결혼문화에서 떡을 내빈에게 나누어 주던 풍습을 따른 것으로 이 시대에 뿌리내려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의 영향 아래에서 서구문물에 대한 개방과 수용은 한국의 역사상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자주적인 결혼문화 환경 조성을 위한 의식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은 괄목할만하다. 제한이 많은 시대 상황 속에서도 개인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모여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행동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결혼문화를 이끌어가는 주체자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참고 서적 및 자료]
https://weddingculture.tistory.com/67

※ 이 글은 '참고 서적 및 자료' 링크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페이지의 특성상 문장 혹은 문단별로 상세 표기하지 못하였으므로 문제 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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