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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_정치·경제]

 

1945,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것도 잠시, 한국은 1948년까지의 미국 군정기와 1950년부터 3년간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미군정 직접 통치 기간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가치보다 조선 시대부터 일본강점기를 거치며 지배 사상으로 작용해 온 유교적 가치가 더욱 위세를 떨쳤다. 이는 사상 교육을 통해 사회 체제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한 지략의 일환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교의 충()의 가치는 천황을 대신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을 조장하는 가치로 작용하였었고, 가장 중심의 가족 질서를 대변하는 효()의 가치 또한 강력한 통치를 위한 사상 가치로 작용했었다. 이 시대에도 이러한 사상체계는 정책 기반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남북 분단 이후 충효 사상은 반공 이념과 결합하면서 당대의 권력 체계에 대한 수직적 틀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이런 양상은 1950년부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 상황 속에서 국가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충효 사상과 연결지어진 반공 이데올로기는 권력에 대한 모든 반대 의견을 묵인하고 무력화시키는 막강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불안정했던 제1공화국은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대에 경제 부분을 살펴보면, 한국전쟁으로 인해 복구 시점에는 미국의 원조물자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를 원조경제라고 한다. 또한, 국민의 75%가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농업 중심 경제를 이루고 있었으나 공업이 서서히 성장하였다. 미국의 원조경제는 한국 사회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미국은 아름답고 고마운 나라, 자유의 나라로 여겨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을 모방하고 미국과 관련된 많은 부분을 거르지 않고 흡수하려는 움직임으로 확산되었다.

 

 

[시대적 배경_사회·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서양 풍조가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고, 서양 문화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생활 의상도 다양하게 바뀌고, 신식 미국식 교육이 보급되어 영어 교육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분단으로 인하여 반공 이데올로기가 우세하면서 권위주의와 획일주의, 국가주의 등이 더욱더 내세워졌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시대이다.

반공 이데올로기 사상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영향으로 서구의 문물과 서구적인 소비 및 유흥 문화가 빠르게 유입되었기 때문에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혼돈의 시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전통적 가족공동체가 해체되었고, 생활전선에 선 여성들이 생겨나면서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사회로 진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자유연애 풍조도 점점 더 자연스럽게 퍼지게 됨으로써 연애관과 결혼관에 대한 변화와 함께 결혼문화 또한 점진적으로 서양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결혼문화의 변화]

 

주로 일본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서구문물을 미국을 통해 직접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는 한국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자유로운 연애사조와 결혼관이 퍼지게 되고, 결혼문화는 기존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공존하고 절충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전통의 결혼 문화와 서구의 결혼문화를 혼용하는 방법으로 변화되어간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전통혼례를 치렀고, 상당수는 도시의 신식 예식장에서 결혼을 한번 하고 고향에 가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두 번의 결혼을 치르는 것은 변화한 사회상과 결혼관, 즉 자유혼에 의한 결혼, 혹은 개인 간의 합의가 우선시 되는 결혼이 점점 보편화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혼이 가문의 이해관계와 부모의 선택이 아닌 부부가 될 당사자의 의사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문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950년대, 전쟁을 겪은 한국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결혼 공간으로써 신부의 집이 아닌 예식장의 확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주택유실 현상은 인구 이동을 촉진했고, 이는 새로운 공동체의 생성을 의미했다. 특히 전쟁 이후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해체로 마을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이나 장례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꽃상여, 결혼 복장인 사모관대 활옷을 공동으로 보관하는 장소도 사라지면서 필요할 때 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권이 확대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연애결혼이 더욱 확산되는데 이는 이전과 달리 신랑·신부 집안이 근거리에 위치하지 않고, 전통 한옥이 개량되고 한옥이라는 주거형태 점차 사라지면서 결혼의 주 장소였던 신부의 집 마당 자체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결혼식장은 이러한 사회 현상으로 인한 가족 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결혼 풍습의 대안 장소로서 확산할 수밖에 없었다. 예식장은 흩어진 가족공동체는 물론 생활의 변화로 발생하는 다양한 교류 속에서의 관계를 결집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당대 예식장은 서양식 연미복에 하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외국인 신랑·신부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동시에 드레스, 화관, 신부 화장 무료 제공 등의 최신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한, 예식장은 아름답고 고마운 나라인 미국의 결혼문화를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자 이를 통해 이국성을 온전히 체험하고 소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양식으로 변화된 예식은 간략화 과정을 거쳐 이벤트의 성격을 나타내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현대의 결혼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결혼하기 ʻ길한 날ʼ이라고 알려진 날에는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수백 명의 예약자가 십여 개에 불과한 예식장으로 집중되어 부득이하게 요릿집 등에서 예식을 치르는 일도 있었고 하객이 많이 와서 대성황을 이루길 바라다보니 대부분 정오 시간 전후가 예식 시간으로 선호되었다. 또한, 오후 네 시는 숫자 4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으로 피해야 할 불길한 시간으로 인식되었다. 예식장의 대목이 주술적인 신앙형태인 민간신앙에 달려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결혼 의상의 변화를 살펴보면, 신부의 옷은 한복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드레스를 입는 비율이 현저하게 늘어났고, 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랑은 대여한 연미복을 입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상당수가 새로 맞춘 예복을 입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신부 측에서 결혼 전 신랑에게 옷을 선물하는 관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1950년대 말에는 웨딩드레스가 임대를 통해 보편적 착용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시대의 웨딩드레스는 원피스 스타일로 단순하였으나, 양장의 유행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또한, 한복에 서양 의복 스타일을 가미한 드레스가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점차 사회 풍조, 결혼관, 패션 등의 영향을 받아 현대에 볼 수 있는 웨딩드레스의 모습을 갖추었다.

종교의식을 제외한 일반예식장에서의 결혼식 순을 살펴보면 ʻ개회식, 신랑 입장, 신부 입장, 신랑·신부 상견례, 고천문(告天文)낭독, 예물교환, 주례사, 내빈축사, 가족대표 인사, 신랑·신부 내빈께 인사, 신랑·신부 퇴장, 폐식ʼ의 순서이며 각 예식장에는 식순을 인쇄하여 준비해 놓았다. 이러한 식순은 유교적 전통혼례와 당시에 성행하던 기독교와 천도교 등의 종교 예식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계명구락부식 사회혼인 예식절차에서 창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결혼문화 중 또 하나는 전속주례의 등장이다. 신식결혼이 일반적인 결혼 방식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 주례는 본래 기독교 성직자의 역할이었지만 50년대를 지나면서 예식장 결혼이 일반화되고 상업화되면서 성직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직업군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주례는 전통혼례에서 사회자 역할을 하는 집례자와도 비슷하다. 또한, 신랑·신부가 서로를 향해 맞절하고 화촉을 밝히는 행위의 절차는 그 기원이 전통혼례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외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적절한 공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문화의 직접적인 유입과 전쟁으로 인한 공동체의 해체는 전통적인 결혼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 환경적 요인이었다. 전문예식장의 확산과 서구 양식으로의 결혼 의상 변화는 기존 결혼문화를 대신 할 대안적인 공간의 필요성과 동시에 서구 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가 맞물려 거듭 발전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국적이고 화려한 결혼문화의 초석으로 볼 수 있다.

 

[참고 서적 및 자료]
https://weddingculture.tistory.com/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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