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가족 규모의 축소화와 도시로의 이농화현상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혈연관계보다는 비 혈연관계가 중시되어 가족, 혈연 등 1차 집단보다는 직장, 단체, 조직 등의 2차 집단의 관계가 확대 중시되었다.

또한, 권위적이었던 군사 정권 시절에는 생활 전반에 대하여 국가가 통제코자 하여 꾸준한 의식개혁의 시행되었다. 그 노력의 하나로 가정의례에서 허례허식을 간소화하는 ʻ가정의례준칙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직간접적으로 현대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ʻ가정의례준칙ʼ의 태동은 50년대 이후 꾸준히 등장하였던 합동결혼식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많은 커플들이 ʻ새마을 시민 결혼식ʼ을 통해 아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적게는 몇 십 쌍에서 많게는 수백 쌍의 커플이 한꺼번에 식을 올리면서 간소한 방법으로 부부가 되었다.

 

합동결혼식

1950년대 합동결혼식

출처 : 대한뉴스 제190

1970년대 합동결혼식

출처 : 서울특별시

 

반면에, 호화로운 결혼식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64년에 ʻ세기의 결혼식ʼ으로 현대까지도 화자 되는 당시 최고 영화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이다. 이 결혼식은 고급호텔에서 진행된 호화결혼의 대표적인 예시로 지금의 그랜드 워커힐 서울 호텔에서 열린 이들의 결혼식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고, 식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인파 속에서 청첩장이 암거래되기로 했다.

따라서 이때의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합동결혼식과 이와 정반대되는 호화 결혼식으로 나타난 결혼문화의 양극화는 69년과 73년 발현된 ʻ가정의례준칙ʼʻ가정의례에 관한 법률ʼ의 서막을 알리는 태동이었다. 이는 결혼과 관련한 현상이 사회제도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정의례의 공표를 통해 허례허식을 줄여나가고 건전한 사회 기풍을 진작시키면서 빈부의 차이로 인한 사회 분열 방지를 내세우면서 이러한 대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이 제도의 이면에는 이념적이고 국가의 존속이 달린 중요한 사안들이 연결되는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부가 검소와 간소화를 장려한 ʻ가정의례준칙ʼ은 점차 강제성을 띠고 규격화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므로 지역사회 별 문화적 특성과 고유성마저도 소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과 관련된 의례준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1969년에 최초로 공표된 ʻ가정의례준칙ʼ에는 약혼식 폐지, 혼인 당일 혼인신고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기존의 한국 사회의 결혼 풍습의 진행 순서를 간소화하는 것이었다. 1973년에 개정된 ʻ가정의례준칙ʼ에는 청첩장 발송 금지, 함잡이 금지, 답례품의 증여 금지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런데 정부 차원에서 세운 이러한 준칙에 대해서 국민의 여론은 국민의 사생활 영역에 대한 간섭이자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의견들이 형성되었고, 강제성을 띠지는 않았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1973년에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처벌조항도 함께 추가하는데, 이때 발표된 개정안에는 청첩장이나 돌리거나 답례품의 증여 등의 행위가 적발되면 50만 원 이하의 벌금형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1999년에는 ʻ가정의례준칙ʼ이 폐지되고 대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사회적 변화를 고려하여 기준을 대폭 완화하고 절차를 간소화한 ʻ건전가정의례준칙ʼ으로 새로 제정되어 2008, 2015년 보완과 새로운 제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혼문화를 규격화하니 암암리에 호화결혼의 풍조가 되살아나게 되고 이는 결국 예식의 계층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회당에서의 50쌍 이상의 시민 합동결혼식을 진행하는 반면, 고급호텔들이 결혼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호텔예식이 증가하는 추세가 나타난다. 호텔에서는 가족 행사를 빌미로 삼아 금지된 답례품을 나누고, 피로연 대신 파티나 간단한 음식을 대접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적 상류층은 시행령을 피해 가는 여러 가지 사각지대를 만들어 호화예식을 치르고 있었다.

결혼의 계층화는 경제성장과 한국 사회가 서구의 영향으로 점차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사회적 배경으로부터도 영향이 있다. 19601인당 국민소득(GNI)79달러에 불과했던 불경기 속에서도 결혼산업은 호황을 누리면서 성장세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저소득층에서는 결혼 비용의 문제로 결혼식 없이 결혼생활을 하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개인과 가족과 관련된 의례가 빈부격차를 조성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발생하기에 충분하였다. 많은 이들의 생애주기 속에 나타나는 결혼이라는 중요한 의례가 사회통합보다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결혼을 제도 안에서 시행되도록 규격화시킨 것이다.

한편, 1977년에는 혼인법이 개정되는데, 개정된 혼인법을 살펴보면 만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에게 부모의 강요나 간섭 없이 당사자들이 자유 선택에 따라 결혼을 합의하고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만남을 이어갈 수 있고 결혼까지 진행 할 수 있었던 결혼과 관련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법률의 개정이었다.

결혼과 관련한 생활적인 부분에서는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결혼한 부부가 새살림을 차려서 분가하여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ʻ신거제(新居制)ʼ가 보편화하고, 이로 인해 신부가 장만해가야 하는 혼수품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산업화와 물질만능주의로 혼수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혼수의 의미가 변화하여, 과거 친정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오랫동안 사용하고 보관할 수 있는 물품 에서 혼수는 하나의 과시 품목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공업화와 함께 의류보다는 가전제품 품목이 혼수로써 더 중요해진다.

또한,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도시화와 함께 서양식 결혼이 일반화된 1960년대 말 1970년대, 예물이 하나의 필수 결혼품목으로 자리 잡는다. 이 시기의 예물은 양가 집안의 경제 형편에 따라 필요할 때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산 보유의 의미가 컸으며 후에는 물질의 교환이나 신분과시를 위하여 다이아몬드를 포함 한 5대 귀보석을 포함한 5세트 7세트 등으로 세트 수를 늘려 가게 되었다.

이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는 신혼여행이다. 신혼여행은 19세기 말에 서구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에 도입되었지만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대까지 결혼 과정 중 필히 포함되는 하나의 결혼문화로 정착하였다.

한편, 급격한 도시화와 사회변혁은 결혼 관련 서비스업에 대한 욕구를 증폭시켰다. 친인척 지인들과의 주거와 관련된 물리적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신부의 집을 대신할 예식장이 성업을 이루고 뿐만 아니라 결혼과 관련한 서비스업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흩어지면서 친족 공동체 의식은 점차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족 중심의 공동체 해체, 고향과의 물리적 거리 문제, 직장 문제 등으로 하객을 초대하는데 시공간적 제약이 수반되면서 결혼과 관련한 서비스업을 찾는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결혼 관련 서비스산업은 결혼식에서의 일손의 부족, 사회적 제약을 해결할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을 가져다주었다. 결혼과 관련한 서비스산업이 성장하고 보편화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남들과 차별화된 대형화 고급화된 결혼식을 위한 특별한 공간과 고품질 서비스를 찾게 되었으며 결국 간소화를 촉구하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게끔 부추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강압성을 띤 법률은 결혼 공간의 시설물뿐 아니라 결혼의 식순, 결혼서약, 성혼선언 등의 자세한 부분까지 규격화함으로써 정형화된 공간에서의 정형화된 예식을 치르는 방법으로 철저하게 차별화를 억제하고 결혼식장은 신랑·신부를 찍어내는 공장과 같은 공간으로 더욱 변모하는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예식장을 벗어나서는 결혼을 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찾을 수 없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소비가 늘어남에 따라 결혼식장은 점점 기업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예식장 협의회들의 담합과 횡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한다.

기업화되었던 예식장은 60년대에 이미 예식장 시설 안에 통합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드레스실과 미장원, 사진실, 폐백실, 스냅실을 갖추었다. 식을 마치고 결혼행진곡으로 퇴장을 하면 퇴장 마지막 무렵에 친구와 친지들은 서양식으로 콩 주머니와 색 테이프를 던졌으며, 피로연은 자택이 아닌 결혼식장 근처의 식당에서 행해졌다. 또한, 피로연 대신 일본의 유행을 따라 케이크를 답례품으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는 현상이 생겼다. 이 당시에는 단지 모방에 그친 문화 현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단순 모방이 아닌 신랑·신부의 기호에 맞춰진 다양한 구색을 갖춘 답례품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적이고 개인적일 수도 있는 결혼문화가 시대적 이념성을 띠고 사회 체제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장치로서 작용했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선택을 원하는 결혼 주체들의 노력으로 규제 속에서도 차별화 된 결혼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참고 서적 및 자료]
https://weddingculture.tistory.com/67


※ 이 글은 '참고 서적 및 자료' 링크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페이지의 특성상 문장 혹은 문단별로 상세 표기하지 못하였으므로 문제 시 수정하겠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