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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문화는 해당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인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해 왔다. 때문에 특정 시대, 특성 상황 속에서 오랜 기간 사회 및 문화와 지속적인 연관 관계를 맺으며 사회의식, 민족의식, 미의식이 담긴 상징체계의 역할을 해왔다. 결혼은 단지 개인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집단과 공동체 또는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존립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연구할 가치가 있다.

 

결혼은 해당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의식을 반영하고 있고, 역으로 결혼문화를 추적하는 것은 해당 시대의 역사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삼국시대부터 현재 시점까지 한국 결혼의 역사적 변천을 탐구하였다. 결혼의 문화적 변천에 영향을 주는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러한 배경이 결혼문화와 어떤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를 짚어보았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결혼문화를 살펴보았다.

 

삼국시대에는 국가의 틀을 갖추고 중앙집권 체계를 형성한 시대이다. 불안한 국내외 정세로 인하여 국가의 존립을 위한 왕권 강화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왕실과 귀족 사이에는 계급이 존재했으며 왕실과 귀족 계층의 결혼은 세력 유지를 위한 근친혼과 족내혼이 성행하였다. 국가의 정신적 지도이념으로써 불교가 채택되었다. 또한, 주변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국제결혼으로 추정되는 ʻ김수로왕신화ʼ가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서옥제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이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결혼하고 일정 기간 머무는 결혼 풍습이다. 이는 백제, 신라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예측된다.

삼국시대를 잇는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국가를 세운 후,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으로써 지방 호족들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결혼 자체가 세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 중기에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조혼풍습이 있었다.

 

고려에는 남귀여가혼이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슷하지만,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치른 후 거처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는 점이 서옥제와는 구분된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정신 이념이었던 불교 문화를 탄압하고 새로운 지도이념으로써 유교를 도입한다. 이로 인해 조선 지배계층은 유교의 이념에 입각하여 신랑의 집에서 혼례를 거행하는 결혼제도인 친영제의 보급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제도는 기존의 결혼 풍습을 바꿈으로써 나타나는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추구한 바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대신에 남귀여가혼 중 성혼 후 셋째 날 상견례를 하는 절차를 유교 논리에 입각한 성혼 당일에 상견례를 진행하는 절차로 변형한 신속례를 보급하게 되고 이는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조선 사회에서 널리 수용되게 되었다. 이처럼 근대 이전 한국의 결혼문화는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때로는 새로운 문화를 거부하고 때로는 수용을 하면서 변화해 왔고, 현시대에서 일컬어지는 ʻ한국 전통혼례ʼ의 근간이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자생적인 노력이 아닌 외압에 의한 문호개방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한 일본문화와 서구 문화의 수용은 식민지 시대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일제의 영향으로 결혼은 신고하여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법률혼주의가 공표되었다. 또한, 서구문물의 영향으로 인하여 결혼 장소, 결혼 의상 등 결혼문화를 구성하는 많은 부분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일본문화의 영향으로 이 시대에는 피로연과 답례품의 문화가 생겨나기도 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 중심으로 기존 문화와 생활에서의 허례허식을 탈피하고 간소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노력의 하나인 계명구락부식의 신식결혼인 사회결혼이 등장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결혼의 절차 및 식순 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45년부터 1960년에는 미군정과 6.25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역사상 큰 사건이 있었던 시기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대혼란의 시기였다. 미군정의 영향으로 미국문화가 한국으로 직접 유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한옥이라는 주거형태가 사라지고 가족공동체가 해체되는데 이러한 시대 상황은 도시로 이주하게 된 여성 인구가 늘어나면서 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자유롭게 사랑하고 연애하는 자유혼이 확산된다. 또한, 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예식장에서 서양 결혼식처럼 의상을 차려입고 결혼식을 진행하는 모습이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전통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도시에서 신식결혼식을 올리고 가족이 있는 지역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는 문화 현상이 나타난다.

 

1961년부터 1980년에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 정권의 정치체제가 유지되고 경제적인 발전과 산업화를 이룩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의식개혁 운동을 진행하는데, 남의 시선을 의식한 분수에 맞지 않는 결혼문화를 변혁할 대통령 고시의 ʻ가정의례준칙ʼ이 제정된다. 가정의례준칙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규격화된 국가적 제재로 결혼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간소화하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결혼문화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계층화시키고 호화롭고 독특한 결혼문화 향유의 기폭제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1년부터 2000년에는 개인주의 가치관, 수평적인 부부관계의 확산과 결혼을 연애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가치관이 만연해진다. 인터넷이 발달로 세계 곳곳의 선진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고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웨딩산업의 발전과 결혼이 상품화 된다. 이로 인해 웨딩 관련 서비스 업체들이 증가하고, 1980년대 상류층에서만 유행하던 촬영이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화된다. 결혼준비부터 결혼식 그리고 결혼 후의 신혼여행까지, 결혼과 관련된 전반적인 부분이 상품화되는 시대가 열린다. 한편, 1997년에는 IMF 경제 위기로 인해 호화로운 결혼식보다는 실속 있고 알뜰하게 결혼을 준비하려는 현상도 나타난다.

 

200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는 정보통신의 눈부신 발달의 영향 하에 하나의 콘텐츠에도 전 세계가 매초 단위로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지구촌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있는 시대이다. 디지털문화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문화의 흐름이 기존에는 선진국에서부터 흐르는 수직적 구조였다면 점차 다양한 문화가 상호작용하는 수평적 구조로 완화되고 있다. 이는 문화적 다양성을 촉진하고 문화·예술 분야의 성장을 불러오고 있다. 또한, 여성운동의 성과로써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성평등에 입각한 가족법의 개정이 이루어지고, 다양화되고 있는 가족 형태를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결혼의 대상, 시기, 존속 방법 등에 대해서 많은 논쟁거리가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문화를 이끌어가는 웨딩산업은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한 상품과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더 독특하고 차별화된 실험적인 결혼을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세계화와 문화적 다양성이 확산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 서적 및 자료]
https://weddingculture.tistory.com/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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